몸으로 읽는 요한복음보기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안드레와 요한은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는 세례 요한의 전도를 받아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빌립은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직접 초청을 받아드림으로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후 안드레가 자기 형제 베드로를 전도한 것처럼 빌립은 자기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갑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율법에 기록되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분”(46절)을 만났다고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당시 구약 성경은 율법과 예언서라고 할 수 있는데, 성경에 예언된 분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이런 대화로 미루어 보아 그들의 사귐은 영적인 차원에 까지 깊은 관심을 나누던 사이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야기하는 주제로 사람의 됨됨이와 사귐의 범위를 알 수 있습니다.
빌립은 기쁨으로 확신에 차서 나다나엘에게 전했지만 나다나엘은 침착한 사람이라 그런지 냉담한 반응을 보입니다. 예수님이 아주 작은 시골인 ‘나사렛’ 출신이란 말에 귀가 거슬려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46절)고 반문합니다. 빌립의 편견과 부분적인 지식 그리고 지역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말입니다. 이 때 빌립은 더 이상 논쟁을 하지 않고 “와서 보라(come and see)”고 간단히 말합니다. (“와서 보라” 는 말씀은 원래 예수님께서 요한과 안드레에게 하신 말씀이었는데.) 이 말을 듣고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만나러 갑니다. 빌립은 믿을 만한 사람이었나 봅니다. 평소의 신뢰감은 간단한 말에도 힘이 실립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보시고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라고 칭찬부터 하십니다. 그리고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내면까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 전체를 아시고 보시며 긍정적인 말씀을 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가능성과 잠재력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나다나엘은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라고 신기해서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부터 보았다”(48절)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니다. 이 말씀에 놀라며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49절)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최초의 직접적인 신앙고백입니다. 1장에는 여러 번의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 나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어린양”, 안드레는 “메시야”, 빌립은 “율법과 선지서가 예언한 분”라고 다른 사람에게 증언했지만, 나다나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예수님께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면 무화과나무 아래는 나다나엘에게 무슨 의미가 있기에 그런 고백을 했을까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햇볕을 가리기 위해 정원수로 종종 무화과나무를 키우는데, 경건한 사람들은 그 그늘 아래 자리를 깔고 앉아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은밀하게 하나님 나라와 메시야를 고대하며 기도하는 나다나엘의 모습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다나엘만 아는 것이데, 예수님이 아시고 빌립이 찾아가도록 감동을 주신 것이겠지요. 기독교는 더 나아지는 종교입니다. 점점 더 깊이를 더 할수록 더욱 신령한 일들을 보게 됩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는 말씀은 야곱의 사닥다리 환상의 신약적 표현인데 예수님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사닥다리가 되어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처럼, 기도가 올라가고 응답이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우리가 주님을 믿을수록 더욱 깊이 주님을 알 수 있게 하시고, 처음 믿을 때 보다 더욱 풍성한 은혜와 복을 경험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안드레와 요한은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는 세례 요한의 전도를 받아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빌립은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직접 초청을 받아드림으로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후 안드레가 자기 형제 베드로를 전도한 것처럼 빌립은 자기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갑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율법에 기록되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분”(46절)을 만났다고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당시 구약 성경은 율법과 예언서라고 할 수 있는데, 성경에 예언된 분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이런 대화로 미루어 보아 그들의 사귐은 영적인 차원에 까지 깊은 관심을 나누던 사이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야기하는 주제로 사람의 됨됨이와 사귐의 범위를 알 수 있습니다.
빌립은 기쁨으로 확신에 차서 나다나엘에게 전했지만 나다나엘은 침착한 사람이라 그런지 냉담한 반응을 보입니다. 예수님이 아주 작은 시골인 ‘나사렛’ 출신이란 말에 귀가 거슬려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46절)고 반문합니다. 빌립의 편견과 부분적인 지식 그리고 지역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말입니다. 이 때 빌립은 더 이상 논쟁을 하지 않고 “와서 보라(come and see)”고 간단히 말합니다. (“와서 보라” 는 말씀은 원래 예수님께서 요한과 안드레에게 하신 말씀이었는데.) 이 말을 듣고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만나러 갑니다. 빌립은 믿을 만한 사람이었나 봅니다. 평소의 신뢰감은 간단한 말에도 힘이 실립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보시고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라고 칭찬부터 하십니다. 그리고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내면까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 전체를 아시고 보시며 긍정적인 말씀을 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가능성과 잠재력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나다나엘은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라고 신기해서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부터 보았다”(48절)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니다. 이 말씀에 놀라며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49절)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최초의 직접적인 신앙고백입니다. 1장에는 여러 번의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 나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어린양”, 안드레는 “메시야”, 빌립은 “율법과 선지서가 예언한 분”라고 다른 사람에게 증언했지만, 나다나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예수님께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면 무화과나무 아래는 나다나엘에게 무슨 의미가 있기에 그런 고백을 했을까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햇볕을 가리기 위해 정원수로 종종 무화과나무를 키우는데, 경건한 사람들은 그 그늘 아래 자리를 깔고 앉아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은밀하게 하나님 나라와 메시야를 고대하며 기도하는 나다나엘의 모습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다나엘만 아는 것이데, 예수님이 아시고 빌립이 찾아가도록 감동을 주신 것이겠지요. 기독교는 더 나아지는 종교입니다. 점점 더 깊이를 더 할수록 더욱 신령한 일들을 보게 됩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는 말씀은 야곱의 사닥다리 환상의 신약적 표현인데 예수님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사닥다리가 되어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처럼, 기도가 올라가고 응답이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우리가 주님을 믿을수록 더욱 깊이 주님을 알 수 있게 하시고, 처음 믿을 때 보다 더욱 풍성한 은혜와 복을 경험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묵상 소개
거룩한 습관을 키우십시오. 매일 큰 소리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고, 주신 말씀을 몸으로 옮기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움직이는 것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본 묵상을 통해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묵상 이미지는사진작가 David Niblack님이 제공해 주셨습니다.
More
본 묵상은 중앙성결교회 한기채 목사께서 제공해 주셨습니다. 묵상에 대한 문의 사항이 있으시면 중앙성결교회 홈페이지 http://www.cchurch.org 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