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읽는 요한복음보기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예수님은 무슨 준비된 설교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부딪히는 문제를 통해 진리를 말씀 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는 말씀도 나사로의 사건이 없었다면 듣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체하는 사이 나사로는 죽었고 많은 사람이 조문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그곳에 당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리아는 집에 있고 마르다만 예수님을 맞이하러 갑니다. 예수님을 만난 마르다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절)며 다소 섭섭함이 섞인 말을 합니다. 그 말은 “왜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조금만 더 일찍 오시지. 급하게 전갈을 보냈었는데...”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듣고 예수님도 안타까워하십니다. 마르다는 계속해서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마르다의 “무엇이든지”는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을 제외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밖의 다른 것들,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 구하는 것들을 응답해 주시는 것에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 최선을 구하지 않고 차선을 구합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마음을 아시고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마르다의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 드러납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24절)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줄 믿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정도가 마르다의 믿음입니다. 보편적으로 우리의 믿음과 비슷합니다. 믿음에는 큰 믿음과 작은 믿음이 있습니다. 마르다의 믿음은 큰 믿음이 아닙니다.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것, 나사로가 지금 살아나리라는 것은 믿지 못합니다. 마르다의 믿음은 내세의 신앙이지 현재의 신앙은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정도를 하나님에게 믿습니다. 마르다의 하나님은 너무 작습니다. 그의 믿음이 하나님을 작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작은 것이 아니라 당신의 믿음이 작으니 하나님은 당신에게 작게 보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을 작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나보다 조금 더 크고 약간 더 힘이 센 분으로 알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정도를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나사로를 살리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려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지체하신 이유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 6절)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은 엄청 켜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양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 없음을 탓해야지, 능력 없음을 탓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마르다는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27절)라는 신앙고백을 합니다. 이 고백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처럼 아직은 뭔가 부족한 면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 부족한 것을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고 온전하게 하시는 것이 뒤에 나옵니다. 믿음은 자라나는 것입니다. 더 큰 믿음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문제는 믿음입니다. 큰 믿음이 크신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게 합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예수님 우리에게 큰 믿음을 주시옵소서.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하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예수님은 무슨 준비된 설교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부딪히는 문제를 통해 진리를 말씀 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는 말씀도 나사로의 사건이 없었다면 듣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체하는 사이 나사로는 죽었고 많은 사람이 조문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그곳에 당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리아는 집에 있고 마르다만 예수님을 맞이하러 갑니다. 예수님을 만난 마르다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절)며 다소 섭섭함이 섞인 말을 합니다. 그 말은 “왜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조금만 더 일찍 오시지. 급하게 전갈을 보냈었는데...”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듣고 예수님도 안타까워하십니다. 마르다는 계속해서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마르다의 “무엇이든지”는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을 제외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밖의 다른 것들,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 구하는 것들을 응답해 주시는 것에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 최선을 구하지 않고 차선을 구합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마음을 아시고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마르다의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 드러납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24절)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줄 믿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정도가 마르다의 믿음입니다. 보편적으로 우리의 믿음과 비슷합니다. 믿음에는 큰 믿음과 작은 믿음이 있습니다. 마르다의 믿음은 큰 믿음이 아닙니다.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것, 나사로가 지금 살아나리라는 것은 믿지 못합니다. 마르다의 믿음은 내세의 신앙이지 현재의 신앙은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정도를 하나님에게 믿습니다. 마르다의 하나님은 너무 작습니다. 그의 믿음이 하나님을 작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작은 것이 아니라 당신의 믿음이 작으니 하나님은 당신에게 작게 보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을 작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나보다 조금 더 크고 약간 더 힘이 센 분으로 알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정도를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나사로를 살리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려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지체하신 이유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 6절)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은 엄청 켜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양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 없음을 탓해야지, 능력 없음을 탓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마르다는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27절)라는 신앙고백을 합니다. 이 고백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처럼 아직은 뭔가 부족한 면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 부족한 것을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고 온전하게 하시는 것이 뒤에 나옵니다. 믿음은 자라나는 것입니다. 더 큰 믿음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문제는 믿음입니다. 큰 믿음이 크신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게 합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예수님 우리에게 큰 믿음을 주시옵소서.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하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 소개
거룩한 습관을 키우십시오. 매일 큰 소리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고, 주신 말씀을 몸으로 옮기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움직이는 것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본 묵상을 통해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묵상 이미지는사진작가 David Niblack님이 제공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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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묵상은 중앙성결교회 한기채 목사께서 제공해 주셨습니다. 묵상에 대한 문의 사항이 있으시면 중앙성결교회 홈페이지 http://www.cchurch.org 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