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읽는 요한복음보기
이틀을 더 유하시고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해야 합니까? “즉시 가시더라”라고 해야겠지요? '즉시'라는 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들으시고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5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면 즉시 가야 이치에 맞는데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 더구나 그것보다 더 급한 특별히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이틀이란 시간 동안에 나사로는 죽고 맙니다. 교인들이 긴급하게 심방을 요청하는데, 별 사정도 없이 목사가 늦게 갔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마르다와 마리아가 얼마나 예수님을 기다렸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은 후에야 나타나셨을 때 원망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을 보낸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빨리 오실 것을 고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나사로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즉시 가시지 않고 이틀은 더 보낸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사람의 시간이나 요구에 맞추어서 움직이지 않고 하나님의 시간에 맞추어 움직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만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행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이 진정 사랑의 행위인가를 보여주시는데, 때로 우리의 시간과 우리의 뜻과 다른 방식으로 일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생각과 다를 수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지만 응답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최상이며 최선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완전한 죽음에 이르도록 기다리는 것이고, 더 이상의 소망이 없다고, 끝났다고 생각되는 상황에서 다시 일으키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죽음과 다시 살아나는 것을 통해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것을 보여 줌으로 많은 사람이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인간적으로 보았을 때 우선 의아하고 원망스럽지만 그 때가 되면 알게 됩니다. 지금은 부족하기 때문에 판단하기 어렵지만 예수님의 의도는 하나님의 일이 드러나고 영광이 드러날 기회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역사가 인간의 죽음 이전의 상황에서만 유효한 줄로 알지만 예수님의 역사는 인간의 죽음을 넘어서도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역사하지 못하는 시간은 없습니다. 그는 영원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하십니다. 예수님은 종종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죽음이 세상에서 끝을 의미한다면 분명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죽음도 잠을 자는 것입니다. 자는 것은 쉬는 것이요, 다시 깨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하여 영광스럽게 깨어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죽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위험하다고 만류하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것이 빛이며, 빛 안에는 두려울 것이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가시기로 굳게 마음먹으신 것을 보고 도마가 “죽으러 가자”(16절)고 말을 하지만, 이것은 용감한 비관주의입니다. 이 일로 죽지 않습니다. 믿는다고 우울해하지 마세요. 오히려 믿음은 기쁨을 가져다줍니다(15절). 도마는 무슨 일을 만나면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도 고맙지요.
오늘 본문에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죽은 자도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다시 살아납니다. 하나님이 손을 쓰지 못하는 시간은 없습니다. 기도의 응답이 늦어지고,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되지 않을 때에 대한 이유도 나옵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우리가 기도하는 모든 것을 주님의 시간에 주님의 방법으로 주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을 믿습니다. 너무 조급해하고 불안하고 우울해하지 않게 믿음의 확신을 주셔서 맡기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해야 합니까? “즉시 가시더라”라고 해야겠지요? '즉시'라는 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들으시고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5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면 즉시 가야 이치에 맞는데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 더구나 그것보다 더 급한 특별히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이틀이란 시간 동안에 나사로는 죽고 맙니다. 교인들이 긴급하게 심방을 요청하는데, 별 사정도 없이 목사가 늦게 갔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마르다와 마리아가 얼마나 예수님을 기다렸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은 후에야 나타나셨을 때 원망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을 보낸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빨리 오실 것을 고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나사로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즉시 가시지 않고 이틀은 더 보낸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사람의 시간이나 요구에 맞추어서 움직이지 않고 하나님의 시간에 맞추어 움직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만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행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이 진정 사랑의 행위인가를 보여주시는데, 때로 우리의 시간과 우리의 뜻과 다른 방식으로 일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생각과 다를 수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지만 응답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최상이며 최선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완전한 죽음에 이르도록 기다리는 것이고, 더 이상의 소망이 없다고, 끝났다고 생각되는 상황에서 다시 일으키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죽음과 다시 살아나는 것을 통해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것을 보여 줌으로 많은 사람이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인간적으로 보았을 때 우선 의아하고 원망스럽지만 그 때가 되면 알게 됩니다. 지금은 부족하기 때문에 판단하기 어렵지만 예수님의 의도는 하나님의 일이 드러나고 영광이 드러날 기회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역사가 인간의 죽음 이전의 상황에서만 유효한 줄로 알지만 예수님의 역사는 인간의 죽음을 넘어서도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역사하지 못하는 시간은 없습니다. 그는 영원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하십니다. 예수님은 종종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죽음이 세상에서 끝을 의미한다면 분명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죽음도 잠을 자는 것입니다. 자는 것은 쉬는 것이요, 다시 깨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하여 영광스럽게 깨어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죽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위험하다고 만류하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것이 빛이며, 빛 안에는 두려울 것이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가시기로 굳게 마음먹으신 것을 보고 도마가 “죽으러 가자”(16절)고 말을 하지만, 이것은 용감한 비관주의입니다. 이 일로 죽지 않습니다. 믿는다고 우울해하지 마세요. 오히려 믿음은 기쁨을 가져다줍니다(15절). 도마는 무슨 일을 만나면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도 고맙지요.
오늘 본문에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죽은 자도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다시 살아납니다. 하나님이 손을 쓰지 못하는 시간은 없습니다. 기도의 응답이 늦어지고,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되지 않을 때에 대한 이유도 나옵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우리가 기도하는 모든 것을 주님의 시간에 주님의 방법으로 주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을 믿습니다. 너무 조급해하고 불안하고 우울해하지 않게 믿음의 확신을 주셔서 맡기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 소개
거룩한 습관을 키우십시오. 매일 큰 소리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고, 주신 말씀을 몸으로 옮기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움직이는 것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본 묵상을 통해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묵상 이미지는사진작가 David Niblack님이 제공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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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묵상은 중앙성결교회 한기채 목사께서 제공해 주셨습니다. 묵상에 대한 문의 사항이 있으시면 중앙성결교회 홈페이지 http://www.cchurch.org 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