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읽는 요한복음보기
누구의 죄?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과 중도에 실명한 사람은 다릅니다. 중도에 실명한 사람은 과거에 본 적이 있기 때문에 빛이나 사물을 연상해서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 제자들은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을 보고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라고 질문을 합니다. 그들의 질문을 잘 들어 보십시오. 맹인이 된 것은 죄 때문이라고 결론을 이미 내려놓고 다만 “누구의 죄인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죄 때문은 분명한데, 부모냐 자신이냐 책임의 소재를 알고 싶은 것입니다. 궁금하기도 하겠습니다. 태어날 때부터이니 죄를 지을 시간이 없었을 터인데, 아니 앞으로 지을 죄의 값을 미리 가불했나? 아니면 부모의 죄를 억울하게 뒤집어썼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정도니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더 하겠습니까? 바리새인들도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요9:34)하며 맹인을 죄인으로 낙인찍어 놓고 이야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의 종교와 문화적인 상황 안에서 되어진 것이지만 아직도 이런 편견이 사회에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희생자 비난하기’입니다.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놓고 도와 줄 생각은 안하고 그에게서 문제를 찾는 무자비한 행동입니다. 장애를 가진 분들의 육체적 고통 외에 정신적 영적인 고통을 가중시키는 행위입니다. 누가 우리를 재판관으로 세웠습니까?
이들이 질문한 의도는 자기들이 그 사람을 돕지 않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서인지 모릅니다. 그의 게으름 때문에 가난하게 된 것이고, 그의 죄 때문에 맹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므로 자기들의 책임을 회피하고 그들에 대해 도덕적 영적 우월감을 가집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편하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파격적인 발언을 하셨습니다. 장애와 고통을 하나님의 영광과 연결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이기 위해 맹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난입니다. 이것은 장애인을 보는 새로운 시각입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많은 장애인들에게 복음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제가 아는 분으로 강영우 박사님(미국 백악관 국가장애 위원회 차관보)과 안요한 목사님이 그렇습니다. 그분들은 자신들의 장애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 쓰고 있습니다.
유대인들만 인과론적으로 생각했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도 아직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장애를 가진 사람을 대할 때 “왜”보다는 “어떻게”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묻기 보다는 “어떻게” 더불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 미래 지향적인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습니다. 세상 기준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기준으로 보아야 합니다. 장래를 가진 것도 힘든데 마음이나 영혼까지 힘들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과 함께 하면 우리가 그들을 통하여 은혜를 받게 되고 그들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도 볼 수 있습니다. 믿음 생활하면서 죄에 대해 말 할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자신의 죄는 철저하게 회개해야 되지만 남에 대해서는 보는 것으로 쉽게 판단하여서는 안 됩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하나님, 우리 주변에 장애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공감하게 하시고, 그들과 더불어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과 중도에 실명한 사람은 다릅니다. 중도에 실명한 사람은 과거에 본 적이 있기 때문에 빛이나 사물을 연상해서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 제자들은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을 보고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라고 질문을 합니다. 그들의 질문을 잘 들어 보십시오. 맹인이 된 것은 죄 때문이라고 결론을 이미 내려놓고 다만 “누구의 죄인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죄 때문은 분명한데, 부모냐 자신이냐 책임의 소재를 알고 싶은 것입니다. 궁금하기도 하겠습니다. 태어날 때부터이니 죄를 지을 시간이 없었을 터인데, 아니 앞으로 지을 죄의 값을 미리 가불했나? 아니면 부모의 죄를 억울하게 뒤집어썼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정도니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더 하겠습니까? 바리새인들도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요9:34)하며 맹인을 죄인으로 낙인찍어 놓고 이야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의 종교와 문화적인 상황 안에서 되어진 것이지만 아직도 이런 편견이 사회에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희생자 비난하기’입니다.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놓고 도와 줄 생각은 안하고 그에게서 문제를 찾는 무자비한 행동입니다. 장애를 가진 분들의 육체적 고통 외에 정신적 영적인 고통을 가중시키는 행위입니다. 누가 우리를 재판관으로 세웠습니까?
이들이 질문한 의도는 자기들이 그 사람을 돕지 않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서인지 모릅니다. 그의 게으름 때문에 가난하게 된 것이고, 그의 죄 때문에 맹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므로 자기들의 책임을 회피하고 그들에 대해 도덕적 영적 우월감을 가집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편하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파격적인 발언을 하셨습니다. 장애와 고통을 하나님의 영광과 연결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이기 위해 맹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고난입니다. 이것은 장애인을 보는 새로운 시각입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많은 장애인들에게 복음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제가 아는 분으로 강영우 박사님(미국 백악관 국가장애 위원회 차관보)과 안요한 목사님이 그렇습니다. 그분들은 자신들의 장애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 쓰고 있습니다.
유대인들만 인과론적으로 생각했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도 아직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장애를 가진 사람을 대할 때 “왜”보다는 “어떻게”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묻기 보다는 “어떻게” 더불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지 미래 지향적인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습니다. 세상 기준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기준으로 보아야 합니다. 장래를 가진 것도 힘든데 마음이나 영혼까지 힘들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과 함께 하면 우리가 그들을 통하여 은혜를 받게 되고 그들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도 볼 수 있습니다. 믿음 생활하면서 죄에 대해 말 할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자신의 죄는 철저하게 회개해야 되지만 남에 대해서는 보는 것으로 쉽게 판단하여서는 안 됩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하나님, 우리 주변에 장애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공감하게 하시고, 그들과 더불어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 소개
거룩한 습관을 키우십시오. 매일 큰 소리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고, 주신 말씀을 몸으로 옮기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움직이는 것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본 묵상을 통해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묵상 이미지는사진작가 David Niblack님이 제공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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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묵상은 중앙성결교회 한기채 목사께서 제공해 주셨습니다. 묵상에 대한 문의 사항이 있으시면 중앙성결교회 홈페이지 http://www.cchurch.org 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