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읽는 요한복음보기
땅에 쓴 글씨
여인이 음행 중 현행범으로 잡혔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결혼한 사람이 간음할 경우 돌로 치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자기들이 아는 율법대로 하면 될 것을 예수님에게 데리고 온 것은 다른 저의가 있습니다. 더욱 이상한 것은 간음을 했으면 상대 남자가 있었을 터인데 남자는 어디로 빼돌리고 여자만 잡아 왔냐는 겁니다. 대체로 간음의 문제에서 남자의 책임이 더 많지 않던가요? 형평성의 문제에서 불공평한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사람들이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온 목적은 자신들이 문제를 해결하기 곤욕스러워서 자문을 구하게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올무에 넣어 같이 심판하려는 나쁜 의도 때문입니다. 음행을 한 여자와 남의 약점을 빌미로 상관도 없으신 예수님까지 죽이려는 바리새인 중 누가 더 나쁜가요?
저들은 예수님의 딜레마를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라! 자비를 베풀라! 용서하라!” 하셨는데, 만약 간음한 여인을 놓아주라 하신다면 “봐라!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다”라고 정죄할 것입니다. 반대로 “돌로 쳐 죽이라”고 한다면 “위선자다, 사랑하라고 해 놓고서 자기 말도 지키지 않는 사람이다”라고 말 할 것입니다. 양날을 가진 검과 같이 사랑과 정의 사이에서 딜레마에 놓입니다. 이론적으로는 해결이 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잠잠히 땅에다 무엇이라 쓰셨습니다. 무엇이라고 쓰셨을까요? 예수님과 모든 사람들 사이에 잠시의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사람들을 둘러보시면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돌로 치라는 말씀이지만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치란 말입니까 아니면 치지 말라는 말입니까? 예수님은 질문에 대하여 다시 질문하시므로 답변을 하십니다. 돌 던질 자격이 있는 사람은 죄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제 질문은 자신을 향하고 있습니다. ‘나는 돌 던질 자격이 있나?’ 간음한 여인이 자기를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남의 죄는 나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씩 돌아갑니다. 어른들부터 돌아갔습니다. 오래 산만큼 지은 죄가 많은지 아니면 생각이 깊어서인지.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 앞에 힘을 잃은 것입니다. 짧은 말씀이지만 듣는 이의 귀와 가슴을 울리게 했습니다. 말씀이 칼이 되어 심장을 파고드니 그 여자가 불쌍해지고, 팔이 풀리고, 손이 떨렸습니다.
결국 예수님과 간음한 여인 둘만 남게 되었습니다. 의인과 죄인이 남았습니다. 예수님이 돌을 던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십니다(11절). 이것은 치유의 말씀입니다. 죄를 짓기 전에는 예방의 말씀을 하지만 이미 죄를 지은 경우는 정죄하기보다 치료를 해야 합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사랑과 정의가 동시에 나타납니다. 모순 되는 것 같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두 가지가 모두 충족됩니다. 예수님은 정죄가 아니라 구원을 주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 죄를 용서해 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입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우리의 마음과 생활을 보시는 주님, 남의 잘못을 볼 때 우리의 허물을 비추어 회개하게 하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만을 의지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여인이 음행 중 현행범으로 잡혔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결혼한 사람이 간음할 경우 돌로 치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자기들이 아는 율법대로 하면 될 것을 예수님에게 데리고 온 것은 다른 저의가 있습니다. 더욱 이상한 것은 간음을 했으면 상대 남자가 있었을 터인데 남자는 어디로 빼돌리고 여자만 잡아 왔냐는 겁니다. 대체로 간음의 문제에서 남자의 책임이 더 많지 않던가요? 형평성의 문제에서 불공평한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사람들이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온 목적은 자신들이 문제를 해결하기 곤욕스러워서 자문을 구하게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올무에 넣어 같이 심판하려는 나쁜 의도 때문입니다. 음행을 한 여자와 남의 약점을 빌미로 상관도 없으신 예수님까지 죽이려는 바리새인 중 누가 더 나쁜가요?
저들은 예수님의 딜레마를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라! 자비를 베풀라! 용서하라!” 하셨는데, 만약 간음한 여인을 놓아주라 하신다면 “봐라!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다”라고 정죄할 것입니다. 반대로 “돌로 쳐 죽이라”고 한다면 “위선자다, 사랑하라고 해 놓고서 자기 말도 지키지 않는 사람이다”라고 말 할 것입니다. 양날을 가진 검과 같이 사랑과 정의 사이에서 딜레마에 놓입니다. 이론적으로는 해결이 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잠잠히 땅에다 무엇이라 쓰셨습니다. 무엇이라고 쓰셨을까요? 예수님과 모든 사람들 사이에 잠시의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사람들을 둘러보시면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돌로 치라는 말씀이지만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치란 말입니까 아니면 치지 말라는 말입니까? 예수님은 질문에 대하여 다시 질문하시므로 답변을 하십니다. 돌 던질 자격이 있는 사람은 죄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제 질문은 자신을 향하고 있습니다. ‘나는 돌 던질 자격이 있나?’ 간음한 여인이 자기를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남의 죄는 나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씩 돌아갑니다. 어른들부터 돌아갔습니다. 오래 산만큼 지은 죄가 많은지 아니면 생각이 깊어서인지.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 앞에 힘을 잃은 것입니다. 짧은 말씀이지만 듣는 이의 귀와 가슴을 울리게 했습니다. 말씀이 칼이 되어 심장을 파고드니 그 여자가 불쌍해지고, 팔이 풀리고, 손이 떨렸습니다.
결국 예수님과 간음한 여인 둘만 남게 되었습니다. 의인과 죄인이 남았습니다. 예수님이 돌을 던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십니다(11절). 이것은 치유의 말씀입니다. 죄를 짓기 전에는 예방의 말씀을 하지만 이미 죄를 지은 경우는 정죄하기보다 치료를 해야 합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사랑과 정의가 동시에 나타납니다. 모순 되는 것 같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두 가지가 모두 충족됩니다. 예수님은 정죄가 아니라 구원을 주십니다. 예수님만이 우리 죄를 용서해 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입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우리의 마음과 생활을 보시는 주님, 남의 잘못을 볼 때 우리의 허물을 비추어 회개하게 하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만을 의지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 소개
거룩한 습관을 키우십시오. 매일 큰 소리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고, 주신 말씀을 몸으로 옮기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움직이는 것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본 묵상을 통해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묵상 이미지는사진작가 David Niblack님이 제공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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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묵상은 중앙성결교회 한기채 목사께서 제공해 주셨습니다. 묵상에 대한 문의 사항이 있으시면 중앙성결교회 홈페이지 http://www.cchurch.org 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