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읽는 요한복음보기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베데스다(‘자비의 집’)라는 못 옆에 행각 다섯이 있고 거기에는 많은 병자들이 있었습니다. 베데스다 못은 오늘날 간헐천(geyser, 間歇泉)처럼 열수(熱水)와 수증기, 기타 가스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주기적으로 분출하는 온천 같은 곳이었나 봅니다. 당시에 그곳에 물이 솟을 때 들어가면 어떤 병이든지 낫게 된다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물이 동할 때 누가 제일 먼저 베데스다에 들어갈 수 있었겠습니까?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피부병 환자가 있었다면 말입니다. 아마 피부병 환자가 제일 먼저 들어 갈 수 있고 다리 저는 사람과 맹인 순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장애가 상대적으로 덜할수록 행동이 쉽기 때문입니다. 심각한 병에 걸린 사람일수록 더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진짜 치료가 절실히 필요한 사람은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피부병 환자 순일 것입니다. 선착순으로 일을 해결하는 경쟁사회는 언제나 이런 결과를 낳습니다. 이런 베데스다는 잔인한 집입니다.
예수님이 주목한 사람은 가장 심각한 병에 걸린 사람인데, 결국 38년 동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누워서 기다리기만 했습니다. 처음에는 기대를 가지고 나왔다 할지라도 그렇게 세월이 흐르다보면 자기가 왜 그곳에 있는지조차 잊어버리고 나름대로 그런 생활에 적응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듣기에는 좀 의아하지만 예수님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어보신 것입니다. 마음의 병이 육신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육신의 병이 마음의 병으로 번지기도 합니다. 전인적인 치료는 육신과 마음의 병이 동시에 치료되어야 합니다. 이 사람의 마음의 병은 만성의욕 상실증입니다. 그 상태로 38년이나 되었기 때문에 얼마나 기대와 실망을 반복했겠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소원조차 없어진 것입니다. 요즘 회사에 취업을 하려고 지원해도 자꾸 떨어지다 보니 나중에는 지원 자체를 포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의욕상실, 기대 상실, 꿈의 상실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병 이전에 마음의 병을 다루십니다. 기대가 없으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자포자기하면 아무런 도움도 필요가 없습니다.
병자는 “낫기를 원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예 또는 아니요”라고 짧게 대답해도 될 것을 길게 남과 환경을 탓하고 있습니다. 자기 불행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다면 변화가 쉽지만 다른 데에게서 찾으면 변화가 어렵습니다. “물이 움직일 때”는 요행을 바라는 말입니다. ‘왜 나한테는 행운이 오지 않습니까?’라는 말입니다. 수동적인 기다림입니다. 주도적인 삶을 살아야지 운명에 맡겨 사는 삶은 소망이 없습니다.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는 도움이나 배경이 없다는 불평입니다.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는 소원 대신 원망을 늘어놓는 것입니다. 자기가 소원하는 것을 말하면 될 것을 자꾸 환경과 남을 탓합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일어나” (안주 하던 곳에서) “네 자리를 들고” (결단하고) “걸어가라”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능력과 힘을 믿고 결단하고 가라는 것입니다. 요행을 바라지 말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행동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물이 아니라 말씀이 동할 때 치유가 일어납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주님 앞에 나올 때 항상 기대와 소원을 가지고 나오게 하시고, 주님의 말씀이 나의 심령에 동하여 크신 역사 이루어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베데스다(‘자비의 집’)라는 못 옆에 행각 다섯이 있고 거기에는 많은 병자들이 있었습니다. 베데스다 못은 오늘날 간헐천(geyser, 間歇泉)처럼 열수(熱水)와 수증기, 기타 가스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주기적으로 분출하는 온천 같은 곳이었나 봅니다. 당시에 그곳에 물이 솟을 때 들어가면 어떤 병이든지 낫게 된다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물이 동할 때 누가 제일 먼저 베데스다에 들어갈 수 있었겠습니까?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피부병 환자가 있었다면 말입니다. 아마 피부병 환자가 제일 먼저 들어 갈 수 있고 다리 저는 사람과 맹인 순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장애가 상대적으로 덜할수록 행동이 쉽기 때문입니다. 심각한 병에 걸린 사람일수록 더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진짜 치료가 절실히 필요한 사람은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피부병 환자 순일 것입니다. 선착순으로 일을 해결하는 경쟁사회는 언제나 이런 결과를 낳습니다. 이런 베데스다는 잔인한 집입니다.
예수님이 주목한 사람은 가장 심각한 병에 걸린 사람인데, 결국 38년 동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누워서 기다리기만 했습니다. 처음에는 기대를 가지고 나왔다 할지라도 그렇게 세월이 흐르다보면 자기가 왜 그곳에 있는지조차 잊어버리고 나름대로 그런 생활에 적응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듣기에는 좀 의아하지만 예수님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어보신 것입니다. 마음의 병이 육신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육신의 병이 마음의 병으로 번지기도 합니다. 전인적인 치료는 육신과 마음의 병이 동시에 치료되어야 합니다. 이 사람의 마음의 병은 만성의욕 상실증입니다. 그 상태로 38년이나 되었기 때문에 얼마나 기대와 실망을 반복했겠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소원조차 없어진 것입니다. 요즘 회사에 취업을 하려고 지원해도 자꾸 떨어지다 보니 나중에는 지원 자체를 포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의욕상실, 기대 상실, 꿈의 상실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병 이전에 마음의 병을 다루십니다. 기대가 없으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자포자기하면 아무런 도움도 필요가 없습니다.
병자는 “낫기를 원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예 또는 아니요”라고 짧게 대답해도 될 것을 길게 남과 환경을 탓하고 있습니다. 자기 불행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다면 변화가 쉽지만 다른 데에게서 찾으면 변화가 어렵습니다. “물이 움직일 때”는 요행을 바라는 말입니다. ‘왜 나한테는 행운이 오지 않습니까?’라는 말입니다. 수동적인 기다림입니다. 주도적인 삶을 살아야지 운명에 맡겨 사는 삶은 소망이 없습니다.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는 도움이나 배경이 없다는 불평입니다.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는 소원 대신 원망을 늘어놓는 것입니다. 자기가 소원하는 것을 말하면 될 것을 자꾸 환경과 남을 탓합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일어나” (안주 하던 곳에서) “네 자리를 들고” (결단하고) “걸어가라”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능력과 힘을 믿고 결단하고 가라는 것입니다. 요행을 바라지 말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행동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물이 아니라 말씀이 동할 때 치유가 일어납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주님 앞에 나올 때 항상 기대와 소원을 가지고 나오게 하시고, 주님의 말씀이 나의 심령에 동하여 크신 역사 이루어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묵상 소개
거룩한 습관을 키우십시오. 매일 큰 소리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고, 주신 말씀을 몸으로 옮기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움직이는 것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본 묵상을 통해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묵상 이미지는사진작가 David Niblack님이 제공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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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묵상은 중앙성결교회 한기채 목사께서 제공해 주셨습니다. 묵상에 대한 문의 사항이 있으시면 중앙성결교회 홈페이지 http://www.cchurch.org 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