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읽는 요한복음보기

보라 이 사람이로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이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나온 날을 기념하는 것으로 우리로 말하면 8.15 광복절에 해당합니다. 광복절 특사나 사면처럼 로마는 유대인들의 민심을 사기 위해 한 사람을 놓아 주곤 했나 봅니다. 여기 요한복음에 특별히 강도라고 소개된 바라바가 나옵니다. 그는 명예로운 죄인이 아니라 파렴치범으로 소개되어 예수님과 더욱 대비가 됩니다. 누가 봐도 바라바와 예수님을 놓고 보면 예수님을 선택할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흑과 백의 명백한 대조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바라바를 선택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의로운 분이지만 사람들은 강도로 사형 판결을 받은 사람의 아들 바라바를 선택했습니다. 세상은 강도편입니다. 이것은 자유의 남용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지만 우리는 그것으로 언제나 죄를 선택합니다. 그러니 세상의 선택은 결국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도 바라바만큼 예수님의 대속의 교리를 실제적이고 체험적으로 느낀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달릴 십자가에 예수님이 대신 달리고, 그는 예수님 대신 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서 죽음을 가져가고 대신 당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사이에 군인들은 예수님을 데려다가 채찍질하고 가시나무로 만든 관을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조롱하였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다시 군중들에게 데리고 나왔을 때는 예수님의 모습을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사람들에게 “보라 이 사람이로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아까 그 예수가 이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처절한 모습을 사람들이 보게 되면 불쌍한 마음이 들 줄 알았는지 모릅니다. 빌라도는 죄를 찾지 못하였으니 이렇게 때린 것으로 끝을 내려고 했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죽이려고 작정을 했다면 그렇게 매질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그 하수인들은 그 처참한 광경을 보면서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구를 합니다. 이 얼마나 잔인하고 완악합니까?
빌라도는 다시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자신에게 생사여탈권이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빌라도는 참 웃기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는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을 두려워하고, 비겁하여, 불의한 사람들과 한 통속이 되어 불의를 행하는 기회주의자입니다. 그에게는 권한이 없습니다. 그는 시류에 편승하여 여론 재판을 하고 대중에게 책임을 미루는 우유부단한 사람일 뿐입니다. 결국 빌라도는 예수를 “보라 너희 왕이로다”라고 하며 유대인의 왕으로 처단을 합니다. 의로우신 예수님을 희생양 삼아 가이사에게 한 건을 올리는 행색입니다. 유대인들은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다고 소리칩니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 일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고, 유대인들은 가이사가 자신들의 왕이라고 합니다. 가이사가 누구입니까? 유대를 침략하여 다스리는 원수 아닙니까? 십자가는 우리의 모순들이 모인 결정판입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죄악을 십자가로 해결하십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사람들은 자기의 이해득실을 따라 신의와 공의를 저버립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변함없는 믿음을 주시고 진리에 바로 서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유월절은 유대인들이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나온 날을 기념하는 것으로 우리로 말하면 8.15 광복절에 해당합니다. 광복절 특사나 사면처럼 로마는 유대인들의 민심을 사기 위해 한 사람을 놓아 주곤 했나 봅니다. 여기 요한복음에 특별히 강도라고 소개된 바라바가 나옵니다. 그는 명예로운 죄인이 아니라 파렴치범으로 소개되어 예수님과 더욱 대비가 됩니다. 누가 봐도 바라바와 예수님을 놓고 보면 예수님을 선택할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흑과 백의 명백한 대조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바라바를 선택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의로운 분이지만 사람들은 강도로 사형 판결을 받은 사람의 아들 바라바를 선택했습니다. 세상은 강도편입니다. 이것은 자유의 남용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지만 우리는 그것으로 언제나 죄를 선택합니다. 그러니 세상의 선택은 결국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도 바라바만큼 예수님의 대속의 교리를 실제적이고 체험적으로 느낀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가 달릴 십자가에 예수님이 대신 달리고, 그는 예수님 대신 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서 죽음을 가져가고 대신 당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사이에 군인들은 예수님을 데려다가 채찍질하고 가시나무로 만든 관을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조롱하였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다시 군중들에게 데리고 나왔을 때는 예수님의 모습을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사람들에게 “보라 이 사람이로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아까 그 예수가 이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처절한 모습을 사람들이 보게 되면 불쌍한 마음이 들 줄 알았는지 모릅니다. 빌라도는 죄를 찾지 못하였으니 이렇게 때린 것으로 끝을 내려고 했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죽이려고 작정을 했다면 그렇게 매질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그 하수인들은 그 처참한 광경을 보면서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구를 합니다. 이 얼마나 잔인하고 완악합니까?
빌라도는 다시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자신에게 생사여탈권이 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빌라도는 참 웃기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그는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을 두려워하고, 비겁하여, 불의한 사람들과 한 통속이 되어 불의를 행하는 기회주의자입니다. 그에게는 권한이 없습니다. 그는 시류에 편승하여 여론 재판을 하고 대중에게 책임을 미루는 우유부단한 사람일 뿐입니다. 결국 빌라도는 예수를 “보라 너희 왕이로다”라고 하며 유대인의 왕으로 처단을 합니다. 의로우신 예수님을 희생양 삼아 가이사에게 한 건을 올리는 행색입니다. 유대인들은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다고 소리칩니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 일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고, 유대인들은 가이사가 자신들의 왕이라고 합니다. 가이사가 누구입니까? 유대를 침략하여 다스리는 원수 아닙니까? 십자가는 우리의 모순들이 모인 결정판입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죄악을 십자가로 해결하십니다.
함께 드리는 기도
사람들은 자기의 이해득실을 따라 신의와 공의를 저버립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변함없는 믿음을 주시고 진리에 바로 서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 소개

거룩한 습관을 키우십시오. 매일 큰 소리로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고, 주신 말씀을 몸으로 옮기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움직이는 것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본 묵상을 통해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묵상 이미지는사진작가 David Niblack님이 제공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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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묵상은 중앙성결교회 한기채 목사께서 제공해 주셨습니다. 묵상에 대한 문의 사항이 있으시면 중앙성결교회 홈페이지 http://www.cchurch.org 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