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름묵상, 사도행전편 Part2보기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들어가는 글
본문은 베스도에 의해 아그립바 왕 앞에 선 바울이 변론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울의 마지막 변론으로 유대인을 상대로(22:1-22), 공회 앞에서(23:1-6), 벨릭스 앞에서(행 24:10-21), 베스도 앞에서(행 25:6-12) 행한 변론에 이은 다섯 번째 변론입니다.
-본문 이해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2절)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변론하는 것을 다행스럽게 여긴 이유는 그가 유대의 모든 관습에 익숙하였을 뿐 아니라 유대교와 기독교의 종교적 갈등 상황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6절)
아브라함과(창 22:18) 다윗(삼하 7:12-13),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에 대한 소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바울과 사도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어 십자가상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저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게 되었음을 담대히 증거하였지만 오히려 유대인들에 의해 핍박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18절)
그토록 메시아를 소망하던 유대인들이 영적 안목이 어두워 오히려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들의 영적 무지를 책망하셨습니다(마 15:14 ; 요 9:40-41) 단순한 세상적인 지식으로는 영적 세계를 볼 수 없기에 사탄의 지배 아래 영적 암흑 속에 있는 자들을 빛으로(요 1:4-5) 인도해 낼 자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도움 가이드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8절)
그곳에 있는 자들 즉 로마인과 헬라인들은 부활의 교리를 믿지 않았고(행 17:32), 사두개인들도 마찬가지였다(행 23:8). 아그립바 왕 역시 부활을 믿지 않았을 것이고, 결국 아무도 부활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부활 교리는 구약에도 있었다(욥 19:25-26 ; 시 49:15 ; 사 26:19 ; 단 12:2). 바울에게 부활의 교리는 너무도 중요했기에 답답함으로 소리쳤을 것이다.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14절)
당시 자주 사용하던 격언으로 고대 헬라 문헌에도 남아 있다. 짐승이 주인의 말을 듣지 않을 때 더 많은 채찍을 가하는 것을 배경으로 인간이 신을 대적한다는 것이 어리석고 무모한 행동임을 의미한다. 바울의 세 회심 기사의 차이는 증언하는 대상과 상황, 어느 부분을 강조하느냐에 약간씩 다르게 보여질 수도 있으나 종합적으로 볼 때에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묵상 및 질문
1.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변론하는 바울의 심정은 조금이라도 자신을 더 이해해 줄 수 있는 상대가 있을 때 느껴지는 안도감일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약간이라도 말이 통하는 대상을 만났을 때의 심정이 어떠하였습니까?
2. 부활은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무관심의 영역일 뿐입니다. 당시 총독과 왕, 천부장들, 가이사랴의 고관들은 부활에 대한 관심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부활에 대해 관심이 없는 자들을 바라볼 때 바울과 같은 답답함을 느끼십니까?
3.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고생인 것은 회심하기 전 바울의 영적 상태였습니다. 혹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가시채를 뒷발질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들어가는 글
본문은 베스도에 의해 아그립바 왕 앞에 선 바울이 변론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울의 마지막 변론으로 유대인을 상대로(22:1-22), 공회 앞에서(23:1-6), 벨릭스 앞에서(행 24:10-21), 베스도 앞에서(행 25:6-12) 행한 변론에 이은 다섯 번째 변론입니다.
-본문 이해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나이다(2절)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변론하는 것을 다행스럽게 여긴 이유는 그가 유대의 모든 관습에 익숙하였을 뿐 아니라 유대교와 기독교의 종교적 갈등 상황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6절)
아브라함과(창 22:18) 다윗(삼하 7:12-13),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에 대한 소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바울과 사도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어 십자가상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저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게 되었음을 담대히 증거하였지만 오히려 유대인들에 의해 핍박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18절)
그토록 메시아를 소망하던 유대인들이 영적 안목이 어두워 오히려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들의 영적 무지를 책망하셨습니다(마 15:14 ; 요 9:40-41) 단순한 세상적인 지식으로는 영적 세계를 볼 수 없기에 사탄의 지배 아래 영적 암흑 속에 있는 자들을 빛으로(요 1:4-5) 인도해 낼 자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도움 가이드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8절)
그곳에 있는 자들 즉 로마인과 헬라인들은 부활의 교리를 믿지 않았고(행 17:32), 사두개인들도 마찬가지였다(행 23:8). 아그립바 왕 역시 부활을 믿지 않았을 것이고, 결국 아무도 부활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부활 교리는 구약에도 있었다(욥 19:25-26 ; 시 49:15 ; 사 26:19 ; 단 12:2). 바울에게 부활의 교리는 너무도 중요했기에 답답함으로 소리쳤을 것이다.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14절)
당시 자주 사용하던 격언으로 고대 헬라 문헌에도 남아 있다. 짐승이 주인의 말을 듣지 않을 때 더 많은 채찍을 가하는 것을 배경으로 인간이 신을 대적한다는 것이 어리석고 무모한 행동임을 의미한다. 바울의 세 회심 기사의 차이는 증언하는 대상과 상황, 어느 부분을 강조하느냐에 약간씩 다르게 보여질 수도 있으나 종합적으로 볼 때에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묵상 및 질문
1. 아그립바 왕 앞에서 변론하는 바울의 심정은 조금이라도 자신을 더 이해해 줄 수 있는 상대가 있을 때 느껴지는 안도감일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약간이라도 말이 통하는 대상을 만났을 때의 심정이 어떠하였습니까?
2. 부활은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무관심의 영역일 뿐입니다. 당시 총독과 왕, 천부장들, 가이사랴의 고관들은 부활에 대한 관심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부활에 대해 관심이 없는 자들을 바라볼 때 바울과 같은 답답함을 느끼십니까?
3.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고생인 것은 회심하기 전 바울의 영적 상태였습니다. 혹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가시채를 뒷발질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묵상 소개
본 글은 새오름교회의 "오름묵상"에서 발췌, 편집한 사도행전 묵상입니다. 성경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삶에 적용 함으로써 삶의 변화와 성숙을 이루는 깊은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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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를 제공해 주신 새오름교회 김일중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묵상내용에 관해 더 알고 싶은 것이 있으시면 새오름교회 홈페이지 http://www.saeoreum.org 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