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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Is This

5 중 1 일째

2천 년 전 갈릴리를 중심으로 사역하셨던 예수님 곁에는 항상 기적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수많은 무리들이 있었다. 그런데 모두가 병 고침, 해방, 죄 사함, 혹은 영혼 구원을 경험한 것은 아니다. 왜? 무엇 때문에 어떤 이들은 놀라운 신유를 체험한 반면, 다른 이들은 오히려 꾸중을 당했을까?

대부분의 경우, 무리들이 부여한 존칭에 그 원인이 발견된다. 사실 히브리 문화권에서는 존중은 칭호를 통해 드러난다. 즉, 내가 상대방을 어떻게 부르는가에 따라 존중은 혹은 멸시가 반영되기 마련이다. 존중이란, 히브리어로 ‘카바드’인데, 이는 너무나도 중요하기에 이를 귀히 여긴다는 뜻이다. 이에 해당되는 헬라 단어 ‘티미’는 정금과 같이 매우 무겁고 값지다는 개념이 추가된다. 이와 같이 동양 문화권에서는 상대방에게 어떤 칭호를 부여하는가는 매우 중요한 이슈다.

귀신 들린 딸을 위해 간구한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을 가리켜 3회 ‘주’(마 15:22, 25, 27)로 고백하였고, 여리고의 두 맹인 역시 그저 ‘예수’(마 20:30)로 본 무리들과는 달리 3회 ‘주’(마 20:30, 31, 33)라고 불렀고, 2회 ‘다윗의 자손’(마 20:30, 31)이라고 인정했다. 결론은 즉각적인 해방과 병 고침, 즉 성령의 역사다.  

반면에 나사렛 회당에서는 예수님이 멸시를 당하셨다. 마가복음에 보면,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막 6:5)라고 밝히고 있는데, 이는 나사렛 주민들이 볼 때에 예수님은 그저 ‘목수’(막 6:5), ‘목수의 아들’(마 13:55), ‘요셉의 아들’(눅 4:22)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제 이런 칭호들이 눈에 들어오는가?

예수님은 칭호를 통해 누가 자기를 존중하는지와 존중하지 않는지를 판단하셨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예수님께 어떤 칭호를 부여하고, 어떤 마음으로 다가가는지는 매우 중요하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외치며 경배하는 것과 우주 만물의 중심 되시는 예수님을 등지고 옆사람에게 “Who is this?”라고 묻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이 알아봄의 법칙에 따라 어느 한 개인의 영원한 처소가 결정될 수 있으며, 최소한 초자연적 표적의 유무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2천 년 전에 수많은 무리들이 그러했듯이 지금 있는 그곳에서 예수님이 누구인지 고백할 때 당신에게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임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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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소개

Who Is This

존중의 법칙은 성령의 역사를 좌우한다. 이번 말씀묵상을 통해 사복음서를 존중의 관점에서 읽어보라. 그러면 예수님께 부여된 칭호가 곧이어 나타난 표적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Who is This 글로벌 프로젝트를 통해 당신은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영적 차원에서 그 어느 때보다 예수님을 존중하기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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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계획을 제공 해주신 아리엘 김에게 감사드립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방문하십시오. http://www.facebook.com/laiglesiadelespiritusan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