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손절보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일반적인 관계에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한번 더 헤아려보는 것이 믿는 자들의 올바른 자세다. 구약성경에 호세아 선지자가 있다면, 신약성경에는 탕자의 비유가 있다. 누가복음 15장은 기쁨의 장이다. 잃은 양의 비유,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 그리고 탕자의 비유는 하나같이 기쁨으로 종결된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둘째 아들이 유산을 미리 물려받아 먼 타국에 가서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내용이다. 이 정도면 아버지의 입장에서 ‘손절’해도 괜찮다. 그러나 아버지는 오히려 자기 아들이 돌아온 것을 기뻐한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 15:20). 아버지의 사전에는 ‘손절’이란 단어가 아예 없다. 이 비유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잘 그리고 있다.
이처럼 복음에는 용서와 화해가 있다!
손절은 죄인가? 크리스천이라고 해서 무조건 손절하면 안 된다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분명히 손절해야 할 대상이 있다고 가르친다. 그들이 바로 이단이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딛 3:10).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요이 1:10). 이 부분에 대해 성경은 단호하게 ‘손절’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에 한해서만 타당하다는 것이다.
디베랴 해변에서 예수님은 부활 후 세번째 나타나셨다. 모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오로지 베드로에게 있는 듯 보였다.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손절’이 가장 적합한 처사였다. 자신을 부인하고 맹세하며, 심지어 저주하기까지 한 수제자와의 인연을 단번에 끊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베드로는 비난을 받아야 타당했다. 그러나 복음에는 용서와 화해가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예수님은 베드로를 ‘손절’하지 않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21:15).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6).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7).
그리고 제 2의 기회를 허락하셨다. 이로써 베드로는 오순절 사건 이후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 2:21).
묵상 소개
요즘 우후죽순처럼 번지고 있는 '손절'에 관한 컨텐츠! '이런 유형의 사람은 당장 끊으라', '이런 친구는 당장 손절하라'는 세상의 메시지에 대해 크리스천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김아리엘 목사님과 함께 하는 이번 말씀묵상을 통해 신앙과 손절에 대해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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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계획을 제공해 주신 아리엘김 에게 감사드립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방문하십시오. http://https://www.facebook.com/Laiglesiadelespiritusan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