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함이 없는 하늘의 샘Sample
[하나님의 의를 받는 믿음]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한 부자 청년 관원이 어느 날 예수님 앞에 나와서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이미 처음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 속에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생을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 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면, 예수님이 오실 필요도, 십자가를 지실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죄사함과 구원이라는 문제는 이미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친히 담당하시고, 갈보리 덕의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그의 핏 값으로 다 이뤄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십자가 위해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윤리와 종교들은 '하라'(Do)는 선행을 기초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은 우리에게 '이미 다 이루었다'(Done)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본문 2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제, 우리에게 남은 중요한 과제는 '선행'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값없이 의롭다하심(구원)을 덧입었다'는 감격과 기쁨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부모의 헌신적 사랑을 깨달은 자녀들만이 효자가 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오늘 교회 안에서조차도 이 사실(은혜)을 모르는 안타까운 모습들이 간혹 보입니다. 교회에 와서도, 그 쥐 꼬리만한 자기의 의(자선, 선행, 윤리적 자존심)를 의지하고 자랑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예배에서도 아무 감격을 느낄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인 신뢰는 불가능합니다. 하덕규 집사의 작사로 유명한 '가시나무 새'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는 자신의 내면이 죄악과 욕심, 교만과 불순종, 게으름의 가시들로 가득 찬 가시나무 숲이 된다면 예수님이 들어와 쉬실 만한 장소가 못 된다는 상징적인 내용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속에 있는 무수히 많은 가시에 당신의 가슴이 찔려 죽으면서도,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사건이 바로 그러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에게 늘 희생적인 사랑이셨습니다. 119 구조대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구조하는 데 가장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구조하려고 왔는데도, 자기 혼자 살려고 발버둥을 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가장 쉬운 사람은 아예 힘을 쭉 빼고 구조자에게 모든 것을 내어맡기는 이들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도 이런 이들이 소개됩니다. 여리고에서 구걸하던 바디매오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여리고 곁을 지나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달려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이를 듣고 다가오신 주님이 소원을 물으실 때, 보기를 청함으로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도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의 육체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영혼의 깊은 절망(불가능)적인 문제들까지도 해결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안에 있는 절망과 한계를 깨닫고 '예수의 이름' 만을 의지함으로 '주님의 은혜'와 '구원의 감격'을 충만히 누리는 삶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Praise the lord!"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한 부자 청년 관원이 어느 날 예수님 앞에 나와서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은 이미 처음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 속에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생을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 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면, 예수님이 오실 필요도, 십자가를 지실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죄사함과 구원이라는 문제는 이미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친히 담당하시고, 갈보리 덕의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그의 핏 값으로 다 이뤄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십자가 위해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윤리와 종교들은 '하라'(Do)는 선행을 기초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은 우리에게 '이미 다 이루었다'(Done)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본문 2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제, 우리에게 남은 중요한 과제는 '선행'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값없이 의롭다하심(구원)을 덧입었다'는 감격과 기쁨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부모의 헌신적 사랑을 깨달은 자녀들만이 효자가 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오늘 교회 안에서조차도 이 사실(은혜)을 모르는 안타까운 모습들이 간혹 보입니다. 교회에 와서도, 그 쥐 꼬리만한 자기의 의(자선, 선행, 윤리적 자존심)를 의지하고 자랑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예배에서도 아무 감격을 느낄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인 신뢰는 불가능합니다. 하덕규 집사의 작사로 유명한 '가시나무 새'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는 자신의 내면이 죄악과 욕심, 교만과 불순종, 게으름의 가시들로 가득 찬 가시나무 숲이 된다면 예수님이 들어와 쉬실 만한 장소가 못 된다는 상징적인 내용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속에 있는 무수히 많은 가시에 당신의 가슴이 찔려 죽으면서도,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사건이 바로 그러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에게 늘 희생적인 사랑이셨습니다. 119 구조대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구조하는 데 가장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구조하려고 왔는데도, 자기 혼자 살려고 발버둥을 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가장 쉬운 사람은 아예 힘을 쭉 빼고 구조자에게 모든 것을 내어맡기는 이들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도 이런 이들이 소개됩니다. 여리고에서 구걸하던 바디매오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여리고 곁을 지나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달려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이를 듣고 다가오신 주님이 소원을 물으실 때, 보기를 청함으로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도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의 육체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영혼의 깊은 절망(불가능)적인 문제들까지도 해결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안에 있는 절망과 한계를 깨닫고 '예수의 이름' 만을 의지함으로 '주님의 은혜'와 '구원의 감격'을 충만히 누리는 삶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Praise the lord!"
Scripture
About this Plan
우리에게 만족을 주는 하늘의 샘은 오직, 주님께만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 주님이 보이신 구원의 길을 따라갈 때, 그 '순종'의 길에만 다함이 없는 하늘의 샘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존중히 여길 때, 주님도 우리를 존중히 여겨주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귀하게 받으며 새김으로, 다함이 없는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흘려보내는 축복의 통로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본 묵상은 하늘샘교회 홈페이지에 담긴 이호석목사의 칼럼 중에 발췌하여 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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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를 제공해 주신 하늘샘교회 이호석 목사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문의 사항이 있으시면 하늘샘교회 홈페이지 http://www.heavenspring.co.kr 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