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함이 없는 하늘의 샘Sample
[기도하는 심령, 기도의 향연!]
본문은 대속죄일 제사에 관한 세부적인 규례의 말씀입니다. 공동체의 성결을 위한 속죄제를 위해서는 먼저, ‘대제사장을 위한 속죄제’(11~14절)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속죄제’(15~19절)가 있어야 했습니다. 공동체의 속죄를 위해 하나님이 선택하신 최초의 대제사장, 아론은 자신과 자기 집안을 위한 속죄재물로 수송아지를 잡은 후, 제단 위에 피어 있는 여호와의 불을 향로에 담고,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두 손에 채워서 휘장 안으로 들어가 여호와 앞에서 분향했습니다. 이 때 향을 피우는 것뿐만 아니라, 그 향의 연기로 증거궤 위의 속죄소를 가리워야만 했습니다. 이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향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가림으로, 제사장이 죽임을 당치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비록 대제사장이 하나님께 선택되고 구별된 사람이었지만 여전히 죄인이고, 그런 그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노출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죄인 된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도 죽지 않습니다. 인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를 둘러 덮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보혈의 공로와 예수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기도로 인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긍휼하심을 덧입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향연은 ‘기도’라는 영적 의미입니다. 13절의 “향연으로 …속죄소를 가리우게 할지니”라는 말씀은 예배자의 기도가 예배자의 죄악을 가리워서 하나님께서 예배자의 죄를 보시고도 그에게 노를 발하지 않으시고, 긍휼하심으로 죄인을 받아주시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경배를 드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불러 일으켜 죄악에서 용서를 받으며, 환란에서 건짐을 입게 되는 실제적인 역사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16절에 보면, “지성소를 위하여 속죄하고”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성소 밖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는 언제나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장소적으로는 떨어진 곳에서 죄를 번한다 하더라도, 인격적인 관계에서는 서로 연결되어 있음으로 사람의 죄악은 하나님의 지성소까지도 더럽혔습니다. 그래서 지성소까지도 속죄를 필요로 했습니다. 그러므로 피 뿌림을 통해 이루어진 지성소의 속죄는 바로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관계가 다시 정결하게 회복된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정결하게 된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가능해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만나는 지성소에 해당되는 장소는 어딜까요? 바로 ‘기도하는 심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짓는 죄악이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기 이전에 이미 마음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며, 우리의 죄가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류를 나누어야 할 우리의 심령 속까지도 직접적으로 부정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그 형제와 먼저 화목하고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는 말씀도, 하나님을 만나는 기도의 심령이 죄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의 보혈로 죄사함 받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허락된 그리스도인들은 심령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삶의 온전함’(성화의 삶)을 통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은혜의 현장)을 지속적으로 이어가야만 합니다. 오늘 하루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선포하는 우리의 삶과 심령 가운데,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은혜로운 손길이 동행해 주시길 바랍니다.
본문은 대속죄일 제사에 관한 세부적인 규례의 말씀입니다. 공동체의 성결을 위한 속죄제를 위해서는 먼저, ‘대제사장을 위한 속죄제’(11~14절)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속죄제’(15~19절)가 있어야 했습니다. 공동체의 속죄를 위해 하나님이 선택하신 최초의 대제사장, 아론은 자신과 자기 집안을 위한 속죄재물로 수송아지를 잡은 후, 제단 위에 피어 있는 여호와의 불을 향로에 담고,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두 손에 채워서 휘장 안으로 들어가 여호와 앞에서 분향했습니다. 이 때 향을 피우는 것뿐만 아니라, 그 향의 연기로 증거궤 위의 속죄소를 가리워야만 했습니다. 이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향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가림으로, 제사장이 죽임을 당치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비록 대제사장이 하나님께 선택되고 구별된 사람이었지만 여전히 죄인이고, 그런 그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노출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죄인 된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도 죽지 않습니다. 인류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를 둘러 덮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보혈의 공로와 예수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기도로 인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긍휼하심을 덧입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향연은 ‘기도’라는 영적 의미입니다. 13절의 “향연으로 …속죄소를 가리우게 할지니”라는 말씀은 예배자의 기도가 예배자의 죄악을 가리워서 하나님께서 예배자의 죄를 보시고도 그에게 노를 발하지 않으시고, 긍휼하심으로 죄인을 받아주시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경배를 드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불러 일으켜 죄악에서 용서를 받으며, 환란에서 건짐을 입게 되는 실제적인 역사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16절에 보면, “지성소를 위하여 속죄하고”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성소 밖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는 언제나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장소적으로는 떨어진 곳에서 죄를 번한다 하더라도, 인격적인 관계에서는 서로 연결되어 있음으로 사람의 죄악은 하나님의 지성소까지도 더럽혔습니다. 그래서 지성소까지도 속죄를 필요로 했습니다. 그러므로 피 뿌림을 통해 이루어진 지성소의 속죄는 바로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관계가 다시 정결하게 회복된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정결하게 된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가능해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만나는 지성소에 해당되는 장소는 어딜까요? 바로 ‘기도하는 심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짓는 죄악이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기 이전에 이미 마음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며, 우리의 죄가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류를 나누어야 할 우리의 심령 속까지도 직접적으로 부정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그 형제와 먼저 화목하고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는 말씀도, 하나님을 만나는 기도의 심령이 죄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의 보혈로 죄사함 받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허락된 그리스도인들은 심령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삶의 온전함’(성화의 삶)을 통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은혜의 현장)을 지속적으로 이어가야만 합니다. 오늘 하루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선포하는 우리의 삶과 심령 가운데,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은혜로운 손길이 동행해 주시길 바랍니다.
Scripture
About this Plan
우리에게 만족을 주는 하늘의 샘은 오직, 주님께만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 주님이 보이신 구원의 길을 따라갈 때, 그 '순종'의 길에만 다함이 없는 하늘의 샘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존중히 여길 때, 주님도 우리를 존중히 여겨주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귀하게 받으며 새김으로, 다함이 없는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흘려보내는 축복의 통로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본 묵상은 하늘샘교회 홈페이지에 담긴 이호석목사의 칼럼 중에 발췌하여 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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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를 제공해 주신 하늘샘교회 이호석 목사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문의 사항이 있으시면 하늘샘교회 홈페이지 http://www.heavenspring.co.kr 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